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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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더 유명하다. 북경 서쪽 외곽인 해정구(海淀區 : 하이디엔취)에 위치해 있으며,

 북경 시내에서는 15㎞ 떨어져 있다.

이화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곤명호는 인공호수이지만, 인공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곤명호 동쪽 기슭에 잇는 17 공교의 난간에 새겨져 있는 544마리의 사자도 볼 만하다.

 또한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은 역시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서태후의 별장

서태후는 공식적으로는 함풍제의 황후이며 동치제의 어머니로 함풍제가 죽은 후 동치제의 섭정이 되었고,

 동치제가 죽은 후에는 광서제를 즉위시키고 거의 반세기 동안 실권을 장악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척 권세욕이 강하여, 보수적 입장에서 1898년 광서제를 유폐하고,

1900년 의화단의 농민투쟁을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포고 하였다.

 결국 전쟁에 패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화원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고 규모가 가장 큰 황실정원이며,

서태후가 단순히 여름 별장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섭정을 대부분 이곳에서 했다.

  이화원은 북방정원의 장중함도 가지고 남방정원의 부드러움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이화원의 건물들은 짙은 불교색채도 지니고 황실의 지고무상함도 보여주면서 중국의 정원예술을 신기할 정도로 잘 보여주는 대표적 예술 걸작입니다.




문창원


입구부터 따가운 햇빛에 지쳐버립니다.



늘어진 버드나무와 자춘정

한여름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듯.

시원한 그늘에 앉아 쉬고싶다.

만수산과 불향각이 보입니다.

인공호수를 팔때 그 흙으로 인공산을 만든것이 만수산입니다.


낙수당

서태후가 평소에 기거하던곳

붉은 기둥과 회색지붕이 특이합니다.












이화원의  걷다보면 처음에 또는 제일 나중에, 긴 회랑인 장랑(長廊)을 만나게 됩니다

 이 장랑은 길이가 728m나 되는데, 기네스북에 기록된 가장 긴 복도식 통로, 장랑입니다.

 

이 장랑은 1750년 건륭제 시절에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 이어진 영불연합군 북경을 침공했을 때에 전부 파괴됐다가 1886년 광서제 시절에 다시 복구한 것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장랑은 자희태후가 비오는 날에도 곤명호를 바라 보면서 산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이 장랑이 유명한 것은, 장랑의 대들보나 천장 등 구석구석에 1만4천여 폭이나 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풍경이나 꽃에서 새나 물고기 벌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역사인물이나 문학작품 속의 인물들까지 참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합니다.  

14000여점의 그림과 중간에 4개의 정자( 유주정 기란정 추수정  석문정)을 지어 쉬어갈수있도록 만들었답니다.











불향각

  이화원의 상징적인 건물은 서태후가 섭정을 하던 궁정이 아니라, 서태후가 예불을 드리던 곳, 바로 유명한 불향각입니다.

 불향각은 41m 3층짜리 건축물로 이화원의 랜드마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서태후는 결코 색녀가 아니었고, 독실한 불자였다고 합니다.

서태후를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고, 반대자들의 미움도 많이 받았지만,

 많은 중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경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 받았던 이유의 하나가 바로 그녀의 불심이라고 합니다.

서태후가 예불을 드리던 불향각에는 천수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천수보살의 마음을 지니고 싶어 했던 여인.






구멍이 열입곱 개라서 십칠공교(十七孔橋)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곤명호 가운데에 있는 남호도로 들어가는 다리.












배운전과 불향각



청지수

중국최대의 원림치석

돌과같이 사진을 찍으면 패가망신한다고해서 패가석이라고도 합니다




인수전



인수전



'서태후'의 전설같은 생애
서태후는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고 후에는 제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로 되었고 제8대 동치황제의 생모로 되었고 제9대
광서황제의 이모로 되었던 것이다.

제7대 함풍황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함풍황제가 죽은후 서태후가 낳은 6살난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그리하여 28세부터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을 통치한 시간이
거의 48년이나 된다.
서태후의 이름은 나라씨였는데 황제의 황후가 동쪽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은 8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3기, 하5기로 나누는데 서태후의 가정은 상3기에 속했다. 

 
귀족 집안이었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이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로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왕자를 출산했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중국정원의 조경과 웅장함을 보고 이동합니다.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을 지나갑니다.

시내거리모습



서커스공연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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