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

 

유배지에서 꽃피운 열정의 결실, 자산어보

 

정약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인 <자산어보>의 저자로 유명하다.

 정약용의 형으로 어려서부터 이익의 학문에 심취했으며, 권철신의 문하에서 배웠다.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당시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하고 있던 이벽 등의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자산어보의 흔적을 찾으려면 사리(沙里)마을로 가야 한다.

 옛 이름은 모래미다.

 정약전이 1806년부터 1814년까지 12년간 살았던 사리마을은 정겨운 돌담과 푸른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사리마을의 중심에는 사촌서당(복성재)이 있다. 

유배 중에도 동네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던 서당이자 조선시대 최고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의 산실이다. 

 

 

 

 

 

 

 

흑산도라 하면 과거 유배지로의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1758∼1816)의 흑산도 유배 생활을 다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적하다 못해 무료한 섬마을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고 

그중 섬은 중죄인들을 가둬두는 유배지로 척박한 삶을 견뎌내야 하는 절망의 땅이었다.

 사학죄인 정약전에게 내려진 절도안치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가족과 떨어져 

죽을 때까지 혼자 살도록 하는 종신 형벌이다.

 

 

 

 

 

 

 

 

 

 

 

 

 

복성재

 

 

사촌서당

사촌서당은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시절 성리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사리공소

 

 

 

 

 

 

 

자산어보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흑산도 어부였던 덕순(德順) 장창대(張昌大)라는 사람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장창대를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독실하게 옛 서적을 좋아했고…

성품이 차분하고 꼼꼼해 귀와 눈에 수용되는 모든 풀, 나무, 새, 물고기 등의 자연물을 모두 세밀하게 살펴보고 

집중해서 깊이 생각해 이들의 성질과 이치를 파악한 사람”이라고 했다.

 

 정약전은 장창대와 숙식을 함께하며 연구하고 궁리해 자산어보를 썼다. 

자산어보에는 흑산도 인근에 사는 바다생물 227종의 이름과 특징, 습성, 쓰임새, 맛까지 기록해 놓았다. 

참고할 만한 자료조차 구하기 어려운 유배지에서 오로지 치열한 관찰과 조사, 연구로 이뤄낸 성취였다. 

이준익 감독의 흑백 영화 ‘자산어보’도 정약전과 장창대의 인연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작품이다.

 

 

 

 

 

 

흑산도 사리 유배문화공원에는 고려시대부터 유배된 이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정약전은 우이도로 넘어가기 전까지 흑산도에서 만 8년을 지내면서

최초의 어류 생태 보고서인 ‘자산어보(1814)’를 집필했다.

몇 해 전 마을에 유배문화공원이 조성되면서 정약전이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사촌서당(복성재)과

돌담길을 복원했다. 고려시대부터 흑산도로 유배를 왔던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과 유배인 도표도 세워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초의 흑산도 유배인으로 기록된 나인 정숙과 좌의정 김재로,

구례 화엄사의 윤장 스님, 조선 말기 유학자 최익현 등이다.

죄명은 해괴한 짓부터 간언, 당론, 불경죄인, 탐욕, 모살죄, 뇌물 수수까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