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

지리산 노고단 산행후

오후에 근처 실상사  서암정사 벽송사까지 다녀왔지만

포스팅이 계속 밀려버렸다...

여행이나 산행후 항상 근처 절집을

다녀오지만 언제나 맨 마지막에

올라오는 포스팅들이다...


남원 실상사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사찰로 천 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큰 길에 주차하고 뜨거운 길을 여유있게 즐기며 걸어본다..

연꽃이 피려면 아직은 한참을 더 기다려야할것같다..

하늘이 멋진날이다..

노고단에선 너무나 깨끗한 하늘이였는데

구름이 이뿌게 장식해주는 뜨거운 오후

연못과 하늘과  푸른나무가 시원해보이기는 한데..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세월호 천일기도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실상사 삼층석탑 (實相寺 三層石塔)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실상사목탑지



약사전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중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명 부 전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제3 송제대왕, 제5ㅓ 염라대왕, 제7 태산대왕, 제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제4 와관대왕, 제6 변성대왕, 제8 평등대왕, 제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과 석등


이 쌍탑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統一新羅) 정형탑(定型塔)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水平)이며 전체의 조형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륜부(相輪部)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통일신라 정형탑의 원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쌍탑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擦柱)를 중심으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보 광 전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칠성각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실상사에 있는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극락전으로 갑니다


극 락 전

 

극락전의 옛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8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실상사에 위치한 수철화상의 탑비이다.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더운 오후지만 스님은 열심히 보수공사중인듯..

실상사는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을 보유해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보물을 간직한 사찰이다.

서암정사로 갑니다..